[기록하기/대한민국_강화]덕진진_1871년 6월 11일 회상

미군은 1871년 6월 10일 초지진을 점령 후, 그 다음 날인 11일 이른 아침 덕진진으로 행군을 시작한다.

1871년 6월 10일 덕진진에 병사였다면, 초지진 전투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덕진진 일대에서 바라보니 그야말로 초지진은 코 앞에 놓인 것처럼 지척에 위치해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력을 갖춘 미군의 소총과 포탄을 보면서, 의욕이 넘치기보다는 어떻게 운명을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다.

신미양요_6월 11일 오전 덕진진

초지진이 격퇴되고 초토화되었음에도 한국군은 포기하지 않고 10일 밤, 초지진 일대에 야영한 미군을 기습 공격한다. 그러나 극명한 무기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바로 후퇴하게 된다.

저자: 펠리체 베아토 – Naval Historical Foundation Publication, Marine Amphibious Landing in Korea, 1871

2026년 7월의 어느 날_덕진진

초지진과 지척에 위치한 덕진진은 돈대의 규모도 더 크고, 포대도 있다.

덕진진에 있는 남장포대는 현재 15개가 복원되어 옛 포대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가까이서 보면 대포는 굉장히 크고 강화 해협은 폭이 넓지 않아 배를 직접 타격할만큼 충분한 사거리 확보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러 자료들에서 교차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화력, 발사하는 것이 폭탄이 아니라 쇳덩어리나 돌멩이로 배에 맞더라고 치명적인 파괴를 주지는 못했다고 한다.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외국 선박은 함부로 지나가지 말라.

강화 해협의 관문인 덕진진에 설치된 비석으로 고종 4년인 1867년에 건립된 것이다. 조선의 쇄국 의지를 선언한 비석으로 당시 신미양요를 조선인이 어떻게 바라보고 대했을지, 생각하게 된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라는 이름으로 세계와 단절된 국가로 각인된다.

조선군의 무기

국립중앙박물관

미군은 총 뒤쪽을 열어 금속 탄피에 탄약을 밀어넣는 방식인 신식 후장식 소총을 갖춘 반면,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사용했던 조총을 자체 무기화한 총구 앞에 화약과 탄환을 쑤셔 넣은 뒤 심지에 불을 붙여 심지가 타면서 발사하는 화승총을 사용했다.
신미양요 때, 사용했던 화승총 유물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 한 자루만 남겨져 있다.

1871년 6월 11일 이른 아침 1시간만에 덕진진을 접수한 미군은 거침없이 광성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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