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완배]한국 재벌 흑역사 1(삼성/현대)

흥미로웠던 혹은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정리해보기

삼성 이야기

삼성 이병철과 효성 조홍제의 일화가 소개된다.
이병철&조홍제

조홍제와 이병철은 초창기 동업 관계로 삼성 물산 설립 때, 조홍제는 1,000만 원을 이병철에게 빌려주고 이병철은 700만 원을 투자한다.
그 이후 1951년 이병철과 조홍제가 같은 자리에서 주주 지분이 이병철 75%, 조홍제 25% 결산 결과를 보고 받게 된다. 조홍제는 당황하지만 친구이자 동업자인 이병철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후 점차 그룹의 주요 실권을 이병철이 장악해 감에 따라 조홍제는 동업 청산을 제안하게 되는데,.,. 동업을 청산하면서 제일제당을 가장 원했던 조홍제는, 이병철과 격론 끝에 제일제당을 얻게 된다. 그러나 차일피일 지분 정리 절차를 미루어지고, 이병철은 부실 기업으로 찍혀 은행 관리를 받던 한국 타이어와 한국 나일론을 넘기기로 재합의를 요구하게 된다.

결국 조홍제는 1962년 이를 합의하고 효성 물산을 설립해 자신의 길을 걷게 된다.


앞에서 한 번 언급한 대로 삼성은 전형적인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였다. 1등 따라잡기에는 워낙 일가견이 있었던 삼성인지라, 자동차 산업에서도 일단 그들이 뛰어들기만 하면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어느 정도 성장할 것이라는 예상이 충분히 가능했다.

한국 재벌 흑역사 1부 100p

삼성은 창업주 이병철부터 돌다리도 두들리는 전법을 고수한 기업가로 보인다. 기본 이상의 재력을 지닌 집안으로 될만한 사업을 주로 투자하면서 성장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도박꾼으로 꽤 오랜 기간 도박을 해 온 이력을 지닌 집안임에도 별다른 특출한 재능이나 이력이 눈에 띄지 않은데 이리 성공할 수 있었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이병철과 홍진기의 이야기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홍진기는, 1940년 고등문관 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1943년 전주지방법원 판사가 된다.
이승만 정부 시절 1954년 법무부 차관이 된 후, 그 이듬해 법무무 장관으로 승진한다.
이승만이 가장 아끼던 장관으로 알려진 그는, 1959년 2월 <경향신문>이 여적(餘適)이라는 칼럼을 통해 다수결의 원칙과 공명 선거의 정신을 강조하며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자,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기에 이른다. 같은 해 7월 죽산 조봉암 선생의 처형 명령에 최후로 서명하며 이승만 독재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성공한 이후 학생들에게 마구잡이로 총을 쏘게 한 발포 명령자에 대한 검찰 조사가 시작되고 수사 결과는 홍진기로 밝혀졋다. 이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지만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결국 196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다

이병철은 홍진기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그를 출소시켰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홍진기는 중앙일보에 사주가 되고 이병철의 삼남 이건희와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을 하면서 사돈관계로 이어지게 된다.

현대 이야기

현대의 노동 탄압 스토리
현대 조선 폭동 사건

정주영이 현대 토건을 세운 것은 1947년이지만, 실제 현대라는 이름의 그룹의 형태를 갖춘 것은 1970년대로 1971년 제1대 현대그룹 회장이 취임한다.

1973년 한 해 동안에 조선소에서는 1,894건의 산재 사고가 일어났는데 이 중 34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4년에도 7월까지만 무려 1,566건의 산재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 가운데 25명이 숨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노동자는 “정말 미친 듯이 일했다. 용접을 했는데 최고 40시간까지 잠 한숨 못 자고 일한 적도 있다.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이동하다 떨어져 죽은 사람도 수두룩햇다. 죽은 사람이 손에 쥔 것은 몇 푼의 보상금이었다. ” 고 치를 떨었다. 정주영이 자랑한 ’26만 톤 유조선과 조선 입국’ 은 사실 59명 노동자들의 소중한 목숨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한국 재벌 흑역사 1. 223p

27개월 만에 26만 톤 유조선을 완성한 정주영은, 이어 선진 노동 관리 기법이라고 불리는 임금 제도로 더 가열차게 노동자를 몰아붙인다. 일종의 성과급 개념으로 직급별 월급을 받던 노동자들의 월급이 깍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잦은 해고가 이어지자 노동자들은 폭발하게 된다.

  • 능률급제 철폐
  • 부당 해고 금지
  • 사원과 기능공의 차별 대우 철폐
  • 시간당 임금 100% 인상
  • 상여금 지급
  • 노동조합 결성 보장
  • 임시직의 공원 습격 보장 등 13개

협상은 격렬되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본관 유리창에 돌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기동 경찰이 투입되어 사태 진압이 시작된다. 1970년대 최대 규모의 노동자 투쟁인 이를 현대 조선 폭동 사건이라 부른다.

현대 중공업 식칼 테러 사건

1989년 1월 8일 현대 그룹은 현대 중공업 파업 중 석남사 수련회장을 급습해 노동자들에게 집단 폭행을 가하는 1차 테러를 진행한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989년 2월 21일엔 2천 명 규모의 구사대(회사를 구하는 부대)는 현대 중공업 시위 현장에 난입해 식칼과 쇠파이프를 휘두리는 2차 테러를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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