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 현대 미술관(서울관)은 26.08.27. – 27.02.09. 서도호 전시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매주 온라인 예매가 열리지만, 서도호 전시는 꽤 인기가 있어 금방 매진이 된다.
BUT, 그러나 국립 현대 미술관은 수, 토요일 야간 연장 전시는 모든 전시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는 점, 오랜만에 토요일 늦은 오후 미술관을 찾았다.
미술관 가는 길
가을 초입을 지나, 완연한 가을에 길목이다.

광화문 광장에는 소상공인 소규모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국립 현대 미술관

미술관 야간 전시 관람은 6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야간 관람 시간에 딱 맞춰 미술관에 들어섰는데, 줄이 꽤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입장객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도록 순차적으로 입장권을 나눠주었다. 젊은 커플과 1인 관람객 비율이 높아 보였다.

천장 조명을 관찰하며 지루한 기다림을 달랬고 이내 입장이 진행되었다.
서도호 전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이자 조각가라고 하는데, 사실 잘 모른다. 일단 전시를 관람하긴 했지만, 작품 감상 내내 소재에 대한 궁금증을 떨칠 수가 없었다.
2020년 5월에 진행한 DMA 미술관 큐레이터와 한 인터뷰 중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은 궁금증을 조금은 풀어주었다.
Q .
전등 스위치 같은 작은 요소부터 건축 구조 전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패브릭(천) 작품들은 한때 ‘집’이라 불렀던 특정 장소를 재현하고 있으며 종종 정확한 주소를 제목으로 사용합니다. 《허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0-10》(2016)에 영감을 준 공간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왜 이 특정 구조물을 천으로 재현하기로 선택하셨나요?
A. (서도호 작가)
《허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0-10》은 제가 자란 서울 부모님 집의 일부입니다. 서민의 삶을 체험하고 싶어 했던 순조(1790~1834) 임금이 19세기 초에 지은 집을 1970년대에 복원하여 지은 전통 한옥입니다. 저는 서울에 돌아올 때마다 그곳에 머물기 때문에 제게는 수십 년의 기억이 쌓인 장소입니다. 저는 이 천으로 된 건축 작업이 일종의 허물을 벗는 행위, 즉 옷을 벗어 조용히 짐을 싼 뒤 다른 곳에서 다시 펼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허브(Hub)’ 조각들은 복도, 통로, 입구와 같은 전이적이고 경계적인(In-between) 공간들입니다. 이 작품은 욕실과 거실/침실 사이에 있는 구역입니다. 한국의 전통 건축은 서양 건축보다 훨씬 투과성이 높습니다. 방과 방 사이의 구분이 덜 엄격하고 외부 세계가 훨씬 잘 통합되어 있습니다. 소리가 전달되고, 문이나 창문이 벽이 되며, 외부 환경의 온도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고, 공간 자체가 낮과 밤에 따라 재구성됩니다. 이러한 투과적 특성이 작품 전체에 반영되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천의 반투명함이 핵심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천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 건축의 이러한 특성과 천이라는 재료가 가진 친화성 때문이었습니다. 《허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0-10》은 아마도 제 허브 작품들 중 원본 구조에 가장 가까운 작품일 것입니다. 세 면의 벽이 한지로 덮인 문과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전이가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제목에 사용된 주소는 특정 장소성(Site-specificity)에 대한 제 관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소는 하나의 명확하고 실체 있는 공간에 매여 있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제가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종의 데이터인 셈이죠. 이 허브 작품의 제목은 식물학자가 꽃을 어디서 언제 채집했는지 세밀하게 기록하는 노트처럼 작동합니다.
제 패브릭 건축 작품들은 특정 공간의 세부 사항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특정 장소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소성의 개념에 도전합니다. 기억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특성을 전달하는 천이라는 재료로 건축 공간을 제시한다는 개념 자체가 미술관 환경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매력적입니다. 재료의 투명성 덕분에 작품을 통해 미술관 자체의 건축 구조를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미술관 공간과 관람객 모두가 작품 내부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관람객과 기존 건축물 모두 작품의 일부이자 주제가 됩니다. 특정 장소성은 하나의 장치인 것입니다.
또한 저는 (팬데믹 봉쇄 이전의) 세계화된 세상의 급격한 변화—끊임없는 이동, 이미지와 정보의 범람—속에서 시공간적 경험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장소의 특정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나의 경험은 당신이나 다른 이의 경험과 어떻게 연결될까요? 우리(개인이자 집단으로서)는 이주와 상실을 어떻게 적응하고 재건하며 다루어야 할까요? 어떤 면에서 이 패브릭 조각들은 생존 기제이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는 모두 집에 갇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 구조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출처: 댈러스 미술관 DMA Uncrated, 큐레이터 Vivian Li 인터뷰, 2020년 5월)

작가의 습작, 메모 스케치, 아이디어 스케치 등 전시의 시작이 된다.
캠핑 리스트를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정리해 놓을 수 있다니 부러울 따름이다.

시드 뱅크 코너에 전시된 사랑받는 명반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는 친구 사이로 서도호 작가가 친구인 유재하를 위해 직접 그린 초상화라고 한다.




이어지는 작품들은 실타래로 얽히고설킨 한지 위에 실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소재 자체도 생소했지만 끝없이 실로 그려낸 작품들이 ‘무엇’을 향하고자 한 것이지? 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끝없이 이어질 듯하기도 했지만, 쉽게 풀리지 않을 것처럼 군데군데 뭉쳐져 있는 실타래도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사람과 사람에 연결을 말하고 싶은건가? 아니면 수없이 많은 인연의 갈래를 표현한건가? 하나의 사람에게 연결된 실의 갈래는 무수히 많았고 규칙이 없어 보였다.


한참 실타래 그림과 천 작품들을 보고 나니 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이 등장한다.

성북동 한옥을 비롯해 자신이 떠나왔거나 곧 사라질 장소를 탁본한 이 연작의 제목은 ‘문지르다(rubbing)’와 ‘사랑하다(loving)’의 발음적 유사성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문지르는 행위 자체가 매우 사랑하는 행위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두 단어를 연결했다.”고 말한다. 벽과 바닥, 문틀과 창에 한를 밀착시킨 뒤 흑연과 색연필로 오랜 시간 문질러 남긴 흔적은 집의 형상을 재현한 이미지가 아니라, 몸과 장소가 함께 축적한 시간을 기록한 촉각이 풍경이다. 서도호는 <러빙/러빙 : 서울 집>(2013-2022)을 아버지와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세대가 지나온 시간은 집의 표면 위에 겹겹이 축적되고, 집은 기억을 품은 살아 있는 신체처럼 드러난다.
집짓는 미술가라고도 불리기도 한다는데, 가히 엄청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이 담긴 집에 한지를 붙인 후 흑연과 연필로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작업을 진행해서 탄생한 작품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작품이 갖고 있는 의미가 좋았다. 문지르다(rubbing).


한옥의 추억을 지닌 세대라면, 아련한 기억 중 처마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한옥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그 아래서 비를 피하면 느껴지던 아늑함과 정겨움.

그리고 겨울 처마 밑에는 길게 매달려 햇살에 반짝이는 고드름이 있었고, 가을이며 떫은 감을 한옥 처마에 올려 달콤한 연시가 되기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사람의 형상을 실로 이어 만든 작품들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얽힌 실들을 썼을까?’ 라는 물음이 있었다. 한 사람으로 출발한 실은 밖으로 길게 뻗어나가 이어지기도 했고 어떤 것과 연결되기도 했다. 그 이어진 실은 복잡하게 엉켜있기도 했고 불규칙한 모양을 띄기도 했다. 단순히 ‘인연인가?’ 그걸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결국 닿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품을 다 보고 뒤돌아갈 무렵, ‘내 삶이 그랬듯, 작가가 바라보는 삶도 녹록치 않았나부다. 그런 녹록치 않은 삶 속에서도 결국은 연결되고 연결된 소중한 기억과 관계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올해의 작가 수상작 전시

올해의 작품상 후보인 네 작가(이해민선, 이정우, 전현선, 홍진휜) 작품을 감상했다.


난해하고 낯선 작품들이 이어졌다. 도통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몇 개의 작품은 깊이 빠져들기도 했다.
이정우 작가의 ‘뜬구름’은 대략 30분 정도의 긴 영상이었는데, 보면서도 도통 뭐지?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피지컬 AI가 월드 모델을 통해 학습을 진행하는 것에 영감을 얻어 그런 AI가 학습을 마친 후, 인간과 대면하게 되는 시점에 일어날 현상들을 작업해 본 것이라고 하는데, 굉장히 기이하면서도 알듯 모를 듯 인간과 AI의 모호한 경계와 가상과 현실에 대한 모호성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전시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홍진휜 작가에 ‘이미지의 최고 형태는 무장 투쟁이다.’ 였다.
동물 행동학자 존 캘훈의 ‘유니버스 25’ 실험, 그리고 학생 몸짓패의 고뇌 + 퍼포먼스, 광장 집회 기획자의 인터뷰를 엮어서 만든 다큐 작품이었다.
다큐에서 등장하는 유니버스 25는 천적이 없고 먹이가 무한정으로 제공되는 유토피아 공간에 쥐 4쌍을 시작으로 한 실험이었다. 초기 질병, 천적, 추위/더위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폭발적으로 번식하며 개체 수가 늘어나다가 공간적/사회적 밀집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자, 극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로 관계망이 깨지면서 가족이 해체되고 어미가 새끼를 공격하는 등의 곳곳에서 폭력적인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연구자는 파국 속에서 자란 다음 세대인 아름다운 자들(The Beautiful Ones)에 주목한다. 그들은 교배나 영역 싸움 등 모든 사회적 관계를 끊고 오로지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는 비사회적 개체군을 칭한다. 그들은 어떠한 상처도 없이 깨끗하고 정갈한 쥐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자들은 성숙한 성체가 된 후에도 교배, 영역 싸움 등 본능적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고 암컷과 수컷 모두 서로에게 완전히 무관심한 채 오직 먹고, 자고, 자신의 털을 핥는 행위만 반복하다 1973년 마지막 남아있던 쥐가 수명을 다해 죽으면서 개체군 전체가 완전히 멸종하는 결론에 이른다 .
Q. 작업 전에 먼저 텍스트로 작품을 설계한다고. 동물행동학자 존 캘훈의 ‘유니버스 25’ 실험과 몸짓패의 퍼포먼스, 프로파간다 공연 영상 등의 구성 요소를 어떻게 연결하고자 계획했나?
A. 글쓰기는 설계의 목적도 있지만 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일종의 제의적 행위다. 비극을 다루지만 사실 누군가의 고통이나 상황을 전달하는 데 관심이 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그렇기에 작업이 세상에 나와도 될지 고민하며 글로 정리해본다.지금이 몸짓의 마지막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 여전히 지키고 있는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집회가 급변하는 과정에서 탈락하는 존재들을 한 번은 언급해야 하지 않겠나. 캘훈의 실험을 주머니에 넣은 지는 오래됐다. 박근혜 퇴진 촛불 집회 당시 자연스레 참여자와 전투경찰이 대치할 상황이 벌어졌다. 집회에서는 일상다반사다. 그런데 시민들 사이에서 “전경들을 밀지 말라”, 더 나아가 “전경 차에 스티커를 붙이지 말라”는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폭력을 반기겠냐만, 폭력이라는 가능성 자체를 스스로 소거하는 투쟁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결국 남는 것은 아름다운 국민성, 아름다운 시민성, 아름다운 이미지인 걸까. 지난 10년간 쌓인 집회에 대해 생각을 이리저리 엮어보았다.
광장 기획자랑 몸짓패, 그리고 유니버스 24 실험에 대한 서사가 교차 편집되면서 엮어내는 다큐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름다움’ 이었다.
아름다운 쥐가 결국 멸종한다는 것, K-POP이라는 새로운 응원봉 문화가 등장하면서 집회가 아름다워진다는 것, 작가는 여전히 싸우고 있는 그 생존과 투쟁의 현장조차 퍼포먼스로 소비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변질되어 가는 현상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던 것 같다.
모두에게 무해한 통제 가능한 것을 지향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름다움’은 결국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 마찰과 부딪히고 상처 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야성을 찾아야 하나부다. 이 작품은 ‘아름다움’ 에 대한 진한 잔상을 남겼다. 어떤 것도 참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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